[편지]2. 남겨진 기록이 아닌 함께 만들 대화를 기대하며 (7.22, 혜성)

2021-08-21
조회수 158



두 번째 편지,
남겨진 기록이 아닌 
함께 만들 대화를 기대하며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서는 숨만 쉬어도 땀이 줄줄 흐르다가도 아주 잠깐 약 올리듯 바람 불어 청보리가 사르르 몸을 흔들면, 순간 마음만은 시원해진다.

 

가은씨, 오늘 오전엔 밭에 다녀왔어요. 이 주나 못 가봐서 얼마나 엉망이 되었을지를 상상하며, 무거운 몸을 일으켜 겨우 다녀왔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무서운 기세로 자랐더라고요. 대자연 어머니는 마치 사탕 기계처럼 이 계절 가장 맛있는 제철 채소들을 뿜어내는 중인데, 부족한 저는 아직까진 그녀의 속도를 못 따라가고 있어요. 일 년 중 가장 더운 계절,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정오에 밭에 나가 있는 엉터리는 저밖에 없더군요. 이리저리 남의 밭을 무단침입한 땅콩호박 덩굴을 간신히 제거하고 다혜와 나눠 먹을 채소 몇 가지를 챙겨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대자연 어머니는 마치 사탕 기계처럼

이 계절 가장 맛있는 제철 채소들을

뿜어내는 중이었어요.'



이 쪼끄마한 것이 저도 단호박이랍시고 손에 닿는 느낌이 단단하니 알찬 것이 느껴진다. 내가 한 것 하나 없이, 그저 곁에 와있었다고 땅 엄마가 키워서 선물해주는 단호박이다.


밭에서 난리법석을 떨고 온 덕분에 아직까지 머릿속 열기가 빠지지 않아 살짝은 몽롱한 기분으로 책상에 앉았습니다. 가은씨를 언제 처음 만났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봤어요. 가은씨가 큐레이션에 참여했던 전시 덕분에 알게 되었으니 아마 14년도였죠? 당시 저는 주로 사무실에서 전시 자료를 수집하고 콘텐츠를 준비하느라 제대로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요. 가끔 전시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조금 더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이렇게 무언가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다니, 정말 살고 볼 일입니다. 그 당시의 가은씨를 떠올리면 딱 두 가지가 기억에 많이 남아요. 가은씨의 옷이랑 화장이요. 언제나 단정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는데, 아마도 일하고 계신 기관의 특징이었을까요? 일터 밖에서는 뵌 적이 없으니, 그 영향이었겠다 싶기도 하네요. 가은씨 외모에 옷이랑 화장, 헤어스타일까지 모든 것이 밸런스가 멋져서 그때 감상이 참 강렬합니다. 돌이켜보니 대부분 눈에 보이는 것들 위주의 기억 조각이네요. 




이문238에 있을 때 선물 받은 러브레터. 아이들이 가진 순수함의 힘을 이때 처음 느껴봤다. 내가 해준 것이 하나도 없는데, 그저 같은 공간에서 몇 번 얼굴을 봤다고 제 마음을 활짝 열어 보상을 바라지 않는 호의를 베풀어준다.


당시에는 혼자만의 감상으로 그쳤지만, 우리가 같은 시간과 공간에 머물지 않았을 뿐 여러 가지로 인생의 동선이 겹치게 되었죠. 가은씨가 기획했던 어린이 작업실 프로젝트에 저도 잠시 합류하게 되면서 그때 당시 가은씨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답니다. 정확히는 가은씨가 남긴 기록에 의지를 많이 했어요. 아이들에 대해 잘 모르겠단 느낌이 들 때면 가은씨의 일지를 여러 번 뒤적거렸어요. 마치 일기의 자기 독백을 닮아있는 작업실 일지는 아이 한 명 한 명을 향한 진짜배기 애정과 관심이 듬뿍 담겨있어 제가 길을 헤맬 때마다 좋은 길잡이가 되어줬거든요. 어린이 작업실의 많은 아이들에게 향하던 시선이 한 아이를 향해 있는 지금은 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마치 일기의 자기 독백을 닮아있는

작업실 일지는 제가 길을 헤맬 때마다

좋은 길잡이가 되어줬어요.'


처음에 다혜가 가은씨와 함께 콘텐츠를 만들어보자고 했을 때는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게 될 줄 몰랐어요. 번갈아서 글을 쓸 때 생기는 묘한 긴장감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엔 남겨진 기록 속의 가은씨가 아니라 함께 생생한 생각을 전하며 이야기 나눌 수 있어 기뻐요. 우리의 대화를 통해 서로 어떤 지점에 다다를 것인지 많이 궁금합니다. 다혜와 가은씨 그리고 제가 함께 씨앗을 심었는데, 어떤 것이 자랄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랄까요. 저는 이런 예측 불가하고, 흥미진진한 거 좋아합니다. 뭐든 좋으니, 고민이 필요한 삶의 주제들을 마구 던져주세요. 이 씨앗에서 무엇이 자라든 두 팔 벌려 마음으로 환영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7월 22일
혜성 드림 






글, 사진 | 문혜성 goldpricepergram@gmail.com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만 집착한 나머지 어느 한 곳에 마음 두지 못하고 주변부를 맴도는 삶을 살았습니다. 쉽게 변덕 부리며 늘 새로움을 갱신하여 주니어 인생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좌절한 적이 있으나, 어쩔 수 없는 팔자라고 받아들이고 ‘성장은 팔순까지’를 목표로 살고 있습니다. 콘텐츠 기획과 마케팅을 업으로 ‘이직의 아이콘’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10년 동안 10개 넘는 조직을 넘나들며 일했습니다. 가장 최근엔 쉽게 퇴사가 어려운 동업을 시작하여 ‘씨드키퍼’란 이름으로 주어진 공간에서 자연과 가깝게 지내는 다양한 방법을 소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편집 | 씨드키퍼

© seedkeeper
이 게시물의 글과 사진을 허락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활용에 대한 요청 및 질문은 iam@seedkeeper.kr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6 0

대표 송다혜, 문혜성 | 사업자등록번호 510-27-91908 (사업자정보확인)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2021-서울마포-0952 | 주소 서울시 마포구 연남로3길 58, 1층 | 이메일 iam@seedkeepe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