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는 사람들]<가장자리> 라운드테이블 001 (강아름, 권혜민, 서가은, 이정은, 최정원)

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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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DGE ROUNDTABLE

<가장자리> 라운드테이블 001


돌보는 사람들 소개


강아름  매거진<사물함>, 누구나 있는 물건 속 나만의 이야기

권혜민  세 친구가 각자의 집에서 한 마리의 고양이를 함께 돌보는 삶

서가은  어린이 콘텐츠 기획자에서 아이를 돌보는 엄마로의 자기 성장

이정은  스스로를 돌보는 관계 매니지먼트 대화법

최정원  틀을 씌우지 않는 육아 방식, 돌보지 않는 돌봄







산과 들, 바다와 육지 그리고 다른 이종 간에 혼합하는 그 경계들에서 생명이 소멸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풍부하게 여러 가지 새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생태학에서는 이걸 ‘가장자리 효과’라고 부릅니다.


송다혜  오늘 함께 이야기 나눠볼 주제는 ‘돌봄’입니다. 돌봄의 과정이 나한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이야기를 남겼는지에 대해 편하게 대화를 나눠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저희가 이 모임을 처음에는 돌봄 토크라는 가제로 불렀는데요. 돌봄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에 고정관념이 있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가장자리>라는 이름으로 바꿨어요.
문혜성  사물이나 인간 그리고 생명 사이에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모호한 접점들이 많은 것 같아요. 보통은 이것을 중간 현실이나 혼합 현실이라고 부르고요. 교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이 무수하게 많이 존재 하는데, 생태학에서는 이렇게 희미하고 모호한 경계를 생명 탄생의 원천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산과 들, 바다와 육지 그리고 다른 이종 간에 혼합하는 그 경계들에서 생명이 소멸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굉장히 풍부하게 여러 가지 새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데 생태학에서는 이걸 ‘가장자리 효과’라고 부릅니다. 저희도 이 자리를 통해 무언가를 돌보는 분들을 초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눠볼 텐데요. 오늘 모이신 분들도 돌봄의 대상이 각각 다 다른 것 같아요. 저희는 이것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보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삶과 다른 대상을 가진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분명히 서로 얻게 되는 인사이트와 다양한 대화거리들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고, <가장자리>라는 의미가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이름을 붙이게 됐어요.
서가은  가장자리라고 이름 붙였을 때 공감을 했던 부분이었는데요.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저런 고민이 생기는데, 육아하는 사람하고 대화를 나눌 때보다 원래 결이 맞는 친구들하고 대화를 하면 그게 꼭 육아에 대한 주제가 아니었더라도 고민의 답을 얻는 경우가 더 많더라고요. 그리고 그 과정 중 찾는 답이 더 나다운 거 같아요. 사실 육아의 답은 여기저기 많이 나와 있잖아요. 다 모범 답안이죠. 근데 그것을 내가 실제로 적용하거나 진짜 내 걸로 만들기가 쉽지 않아요. 이미 다 하고 있어서 알겠으면서도 순간 어떤 상황을 맞닥뜨리면 또 잘 안되는 거예요. 오히려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답게 그 모범 답안을 소화하는 방법에 대해서 깨닫고, 다양한 인사이트를 얻는 게 혁신적이에요.
문혜성  저는 다혜랑 같이 씨드키퍼를 운영하고 있는 문혜성이라고 하고요. 저희는 식물 돌보는 일을 하고 있는데요. 저희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어서 남다른 책임감과 흥미를 갖고 하는데, 하면 할수록 어려운 부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어려움을 통해 자기 성장이 이뤄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가은씨랑 작년에 <레터 투 레터> 프로젝트를 할 때 좋았던 건, 식물을 돌보면서 느끼는 감상들이 찰나일 때가 많은데 그 경험을 다른 사람하고 대화로 나누고 또 글로 남기니까 온전히 제 것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 점에서 <가장자리>에 많은 기대가 있고, 재밌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참여하고 있습니다. 
송다혜  저희가 어떤 이유로 오늘 초대하게 됐는지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각자 어떤 대상에 대해 애착을 갖고 돌보고 계신지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주세요.






이 경우가 엄청 특수하다기 보단, 가족의 형태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누가 여행을 오래가고, 집을 비워도 처피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집이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같이 처피를 돌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권혜민  저는 원래 친한 언니 두 명이랑 같이 2017년까지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했었어요. 그 시기에 어떤 다른 친구가 새끼 고양이를 공터에서 발견했는데, 본인이 키우는 강아지 때문에 집에 데려갈 수가 없어서 저에게 잠시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었거든요. 별 생각 없이 받았는데, 병원에 데리고 가보니 고양이가 태어난지 이틀밖에 안 된 것 같다고 하는거예요. 어떻게든 살리긴 해야겠다 싶어서 제가 데리고 있긴 했는데, 병원에서는 고양이 상태가 안 좋아서 100% 실명이 될 것 같다 하더라고요. 처음 2-3주는 두 시간에 한번씩 수유하면서 살이 쫙쫙 빠질 정도로 엄청 힘들었어요. 제가 워낙 여행을 많이 다니기도 하고, 언니들이랑 저는 딱히 동물을 키울 생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실명이 될 거라고 하니 입양을 못 보낼 것 같더라고요. 저희끼리 둘러 앉아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하나 엄청 고민했었어요. 울고 불고. 누구 한 명이 책임지겠다고 나서기는 어렵고. 그때는 이미 2주씩 돌아가면서 고양이를 데리고 있었거든요. 집에와서 생각해보니까, 우린 사업도 같이 하고 있고 항상 가까이 있으니까 계속 이렇게 키우는 건 어떨까 싶더라고요. 물어보니까 다들 그렇게 하자고 해서, 그때부터 고양이가 5살이 된 지금까지 함께 돌보고 있어요. 고양이 처피는 지금은 3~4개월 텀으로 세 집 생활을 하고 있죠.
최정원 지금은 어디 있어요?
권혜민  지금 아기가 있는 언니 집에 있어요.
최정원  고양이가 잘 적응하나요?
권혜민  그 질문 엄청 많아요. 한 번은 어떤 술자리에서 누가 저한테 그런 식으로 고양이를 키우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육아 훈수처럼 ‘애는 그런 식으로 키우면 안 돼.’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때 처음으로 인지한 것 같아요. 남의 자식 교육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구나.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건데, 살려내려고한건데. 그런데 이걸 다 설명하기도 어렵고, 어쩔 수 없는 것도 이해가 되고. 이 경우가 엄청 특수하다기보단, 사람으로 치면 이혼한 집의 아이처럼 지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가족의 형태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그리고 이렇게 지내보니까 어떤 친구들은 부러워해요. 누가 여행을 오래가고, 집을 비워도 처피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집이 있으니까. 그럴 때마다 우리는 같이 처피를 돌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서가은  고양이 특성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강아지들은 이사하면 그 공간에 새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잖아요. 고양이도 공간이나 환경에 대한 적응 같은 게 필요 한가요?
권혜민  필요할 수도 있겠죠.
서가은  처음부터 같이 키워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요?
권혜민  처피가 사는 세 집의 반려인이 아기를 빼면 언니들의 남편들까지 5명인데요. 5명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지해요.  그들의 차 소리까지 알아요. 보통 다른 사람들이 집에 들어오면 엄청 하악질을 하는데, 언니 오빠가 데리러 오는 건 바로 알더라고요. 다른 집 가서도 냄새 맡고 돌아다니다 자기가 원래 늘 있던 자리들로 가긴 해요.
최정원  남편이 창원에 있어서 저랑 애기가 친정에서 오랫동안 있었고, 시댁도 워낙 자주 가니까 저희가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 애기는 집이 3개라고 그러거든요. 집마다 자기들 짐도 조금씩 있고, 나름 내 방이라 인식하는 공간도 있어서요. 혜민 님 이야기 듣다보니 그런 느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권혜민  처피 마음이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지만 그냥 이것도 사는 방식 중 하나다 싶어요.
서가은  근데 처음에 언니 남편분들이 본인이 키우겠다 했음에도 어느 한 집으로 아예 보내지 않았다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권혜민  언니 둘 다 한 번도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 책임져야 된다는 엄청난 부담감이 있었던 건데, 함께 키우니 그 걱정이 덜한거죠. 좀 재밌는 부분이긴 해요. 저는 동물을 키워본 경험이 있어서 처피가 컨디션이 안 좋아도 이정도는 괜찮겠다 싶어 넘어가는데, 한 언니는 불안해서 매일 병원에 데려간다거나. 심지어 의사 선생님이 안 와도 된다는데 계속 가고. 서로 방식이 다 다르니까요. 심지어 처피는 실명도 아녜요.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엄청 강한 고양이인 것 같아요. 사람도 안 무섭고, 물도 안 무섭고, 강아지도 안 무서워해요. 무서워하는 거 없이 성격 좀 이상한 고양이.
송다혜  혜민 님은 이전에 다른 동물도 키워보신 적이 있어요?
권혜민  고양이를 키웠어요.
송다혜  그럼 그때는 혼자 키우셨어요? 그때랑 지금이랑 다른 게 있어요?
권혜민  그때도 저희 집에 5명이 같이 살고 있었어요. 두 명이 고슴도치를 키우고, 한 명은 강아지를 키우고.
문혜성  궁금한 게 반려동물은 보통 1:1 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잖아요. 그 관계에서 오는 애착 같은 것. 공동 육묘할 때 그런 부분이 좀 궁금한데요. 내 고양이인 동시에 주양육자가 두 명이 더 있는 느낌이 어떨까 궁금하더라고요.
권혜민  그러게요. 어떤 느낌이지? 좀 다르게 좋아하는 것 같긴 하네요. 한 오빠는 처피를 딸처럼 엄청 애지중지하면서 키우는데요. 지금도 다른 집에 보낼 때 차 안에서 울어요.
문혜성  그럼 그 집에 아예 보낼 생각은?
권혜민  모두 다 한 집에 보낼 생각이 없어요. 서로 데리고 오고 싶어 해요. 두 달에 한 번씩이면 텀이 좀 길어지거든요. 처피가 4개월 넘어서 다시 돌아오잖아요. 처음에는 3개월씩 이었는데 6개월 만에 돌아오니까 너무 길어서 2개월씩하자고 정했거든요. 그 와중에 다른 한 명은 차라리 오래 데리고 있는 게 더 좋은 것 같다고 하고. 저는 사실 어느 것도 상관 없긴한데. 처피와 관련된 것은 의논해서 정해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도, 서로 이때 쯤이면 됐다하고 자연스럽게 알아서 해요.
문혜성  근데 이게 그 주양육자들의 엄청난 신뢰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권혜민  그 생각은 항상 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사업도 같이 했었고, 사업했을 때도 한 번도 싸운 적 없었고. 그런 것들도 기반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서로를 엄청 신뢰하고 있으니까. 저희가 공유하는 당연한 느낌인데, 누군가 주도권을 갖겠다는 것도 없고, 불안함도 없고. 저도 좀 신기해요.
서가은  궁금한게 생겼어요. 아기 키울 때 애가 가진 기질도 있지만, 양육자의 태도가 아이한테 묻어나는 걸 많이 느끼거든요. 저는 사실 불안이 많은 사람인데요. 만약에 고양이를 키운다면, 고양이가 아프면 병원에 하루에 한 번은 아니라도 이틀에 한 번은 갔을 사람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 아이도 불안이 더 생기는 것 같고. 원래 그런 게 없던 애일지도 모르는데, 저로 인해 변하는 것이 느껴지거든요. 제가 애를 대할 때랑 남편이 대할 때랑 저희 엄마가 대할 때랑 아이가 다르게 느껴지는 부분이 조금씩 있어요. 그런데 고양이도 그런가요?
권혜민  다른 것도 좀 있어요.  제가 최근에 놀라는 일이 있었는데요. 보통 다른 집에 데려다 주고 바로 갈 때도 있지만, 머물 때도 있거든요. 처피 데려다주고 그 집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는데 처피가 뛰어올라서 방문을 여는 거예요. 저희집은 동그란 손잡이라 처피가 방문을 열 수 있는지 몰랐거든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다른 언니들이 여태 몰랐냐고, 자고 싶으면 문 열고 들어간다고. 그걸 보니 서로 모르는 게 아직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혜성  너무 흥미로운 지점이다.
권혜민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되게 행운이란 생각들어요. 방문 열고 들어갔다가 살피고 다시 나오는 모습을 보니까 진짜 멋지단 생각도 들고. 다른집에서는 여태 저렇게 했구나 싶기도 하고. 아기가 있는 언니네 집에서는 또 달라요. 아이랑 교감하는 것도 신기하고. 또 어떤 집에서든 공통적으로 하는 행동도 있는데요. 침대에 올라와서 자다가 끝에 목을 물고 나가요. 근데 처피가 이러는 걸 서로 다 아니까 ‘그거 어떤 어떤 타이밍에 쿠션으로 막으면 돼.’ 정보 교환도 하고. 
최정원  아기가 혹시 몇 개월인지?
권혜민  7살이요.
최정원  그럼 되게 오래 본 거네요, 그 고양이를.
권혜민  최근에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귀여운 에피소드가 있었는데요. 아기 이름이 시율인데, 어린이집 선생님이 언니를 불렀나봐요. 시율이가 잘 놀다가 자꾸 친구를 깨물고 도망간다고. 아무래도 처피를 보고 똑같이 따라하는 것 같다 생각했어요. 처피가 물고 도망가는 게, 좋아하면 그러는거다 생각을 하는 건지. 시율이가 처피 누나를 보고 똑같이 따라하는 거구나 싶어 놀랍더라고요.
송다혜  너무 너무 사랑스럽다.
문혜성  극강의 귀여움이다, 진짜.
권혜민  좋아서 그런다고 생각하니까 되게 웃겼어요. 처피가 아기가 울면 옆에 와서 앉아 있나봐요. 근데 자기 깨물리는 것도 아니까 울다가도 물리는 거 눈치본다고.
송다혜  진짜 아주 재밌네 진짜.
문혜성  재밌는 에피소드다.
권혜민  저희도 맨날 서로 신기하다고 해요. 이게 가능하다 생각해서 시작했던 것은 아니니까.
서가은  얼마 전에 고양이들은 루틴을 만든다는 영상을 봤어요.
권혜민  맞아요. 처피도 딱 11시 20분 정도, 11시에서 11시 반 사이에 해가 들어오는 구간에서 한 20분 동안 샤워하거든요. 햇빛 샤워. 근데 다른 집에서는 해 들어오는 시간이 없거나 다를테니 다른 걸 하겠죠.
서가은  4개월 뒤에 돌아왔을 때 또 그렇게 해요?
권혜민  계절 변하면 시간은 바뀌는데, 그래도 늘 자기만의 루틴이 있어요.
송다혜  다큐멘터리나 영화로 나올 내용 같아요. 
문혜성  제목은 처피고, 삶이 엄청 풍부한 고양이야.
권혜민  제가 재택하다 야근을 하면 절대 먼저 침대에 안 눕거든요. 근데 다른 집에서도 똑같이 그런대요. 무조건 사람이 먼저 침대에 누워야 자기도 같이 눕는 고양이에요. 그래서 사람이 야근한 다음 날에는 같이 엄청 피곤해해요. 자기도 늦게 자니까 계속 졸고 있고. 엄청 신기해요. 그리고 다른 언니네서는 언니나 오빠 중 한 명 따라서 방에 들어갔다가도 한 명이 안 온다 싶으면 다시 나와서 데리고 들어가려고 한대요.
송다혜  그러면 밥이랑 간식같은 처피 물건들도 집집마다 다른 거예요?
권혜민  다 다른데요. 뭘 좋아한다고 하면 같은 거 사서 먹이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다 다른 집에서 그거 안 먹으면 이제는 싫은가보다 하면서.
서가은  이런 다른 모습을 보다보면 고양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될 것 같아요.
송다혜  오히려 혼자 키울 때보다 더 자세히 알 것 같은데요.
서가은  애기도 루틴을 만들거든요. 예를 들어 자기 전에 엄마 살을 만지고 좋았다고 느끼면 그걸 계속하거나, 헤어질 때 어떤 행동을 하고 헤어지는 것이 좋았다면 그걸 계속하는. 그러다 그 행동을 못하게 되면 힘들어하고.
권혜민  비슷할 것 같아요. 사람이랑 동물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상대방에게 다시 되돌려 받는 것을 바라지 않으면 괜찮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했을 때 그만큼 돌아오지 않는 게 힘들더라고요. 아이에게는 너무 사랑하고 다 해줘서 부담을 주기 싫었다 해야 하나. 그래서 제 육아 전반에 적당하게 대충 하려는 태도가 있어요. 제가 생각했던 모성이랑 제 경험하고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최정원  지금 29개월이 된 아기 아윤이를 키우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아이 키우는 행위를 돌봄이라 생각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오늘 이야기 들으면서 새로운 깨닫게 된 부분이에요.
송다혜  어떤 면에서요?
최정원  돌봄에 대한 저의 고정관념일 수 있는데요. 제가 임신했을 때부터 많이 생각했던 게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였어요. 제가 뭐든 할 수 있는 능력치를 넘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상대방에게 다시 되돌려 받는 것을 바라지 않으면 괜찮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했을 때 그만큼 돌아오지 않는 게 힘들더라고요. 아이에게는 너무 사랑하고 다 해줘서 부담을 주기 싫었다 해야 하나. 그래서 제 육아 전반에 적당하게 대충 하려는 태도가 있어요. 제가 생각했던 모성이랑 제 경험하고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아이를 낳으면 내 삶의 우선순위가 되면서 제일 중요한 것도 맞는 말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남들 보기에 극성이다 싶은 부분마저 저에게는 편하고 자연스러운 선택이고요. 그냥 저 하고 싶은 대로 키우고 있어요. 삶의 형태가 달라지긴 정말 많이 달라졌지만, 살면서 그동안 하지 않았던 돌봄을 아이를 낳음으로써 하게 되었다는 느낌은 아직 없어요.
송다혜  보통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 자매가 있으면 더 큰 친구가 동생을 거의 기르다시피 하잖아요. 정원 님이 나이 차이가 많은 동생이 있으니, 어렸을 때 이러한 경험들이 혹시 육아에 영향이 있을까요?
최정원  사실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부모님의 의도인진 모르겠는데, 그런 부담을 주지 않으셨어요. 언니라서 누나니까 해야 되는 것이 없었고요. 내가 언니니까 희생한다는 마음으로 뭘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어린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연스러웠던 것 같고요. 뭐 알게 모르게 제 안에 녹아 있을 수도 있겠죠.
송다혜  내가 엄마라서, 누나이고 언니니까 이렇게 해줘야지하는 프레임을 씌우지 않았다는 것이 비슷한 것 같아요.
최정원  그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아까 가은 님이 얘기할 때 다시 느꼈는데요. 제가 가은 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항상 섬세해요. 온유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함께 일할 때도 제가 못 보는 부분을 많이 관찰하고 있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저에게 알려주는 것이 좋았어요. 저는 종종 가은 님한테 아윤이를 잘 모르겠다고 얘기해요. 냉정하게 판단하면 솔직히 가은 님만큼 아이를 관찰하지 않는 것일 수 있어요. 너무 자기 고백 같나요.
이정은  제 남편의 가장 큰 장점이 남을 잘 돌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오늘 모임 전에 ‘나 오늘 돌봄에 관해서 이야기 하러 가야 하는데, 돌봄 그거 어떻게 하는거야?’ 라고 물어봤어요. 그런데 정원 님처럼 똑같이 말하는 거예요. ‘돌본다고 생각을 안 하니까, 돌봄이 되던데?’라고 하길래 ‘도움이 안 돼. 무슨 소리야.’하고 나왔는데 정원님 이야기에 깜짝 놀랐어요. 제 남편이 사람을 되게 섬세하게 잘 돌보거든요.
문혜성  그 프레임을 씌우지 말아야지라고 인지한 게 큰 것 같아요.
저는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육아는 다른 차원이라고 들었는데요. 아무리 알고 노력해도 잘 안 될 것 같은데, 정원 님의 그런 자세가 되게 좋아요.
이정은  아윤이를 돌보기 위해서 정원 님이 자신을 잘 돌보는 사람인 것 같아.
최정원  그거 좀 신경 써요. 제가 요즘에 출산하고 진짜 오랜만에 다시 발레를 하고 있는데요.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그때는 아윤이보다 제 자신을 먼저 돌보려고 노력해요. 아까 가은 님도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활력이 생기는 것처럼 이런 부분이 중요한 것 같아요.
문혜성  좋은데요.
서가은  저도 정원 님의 이런 생각은 처음 들었어요.
최정원  특정 단어를 두고 얘기하지 않았으면 제가 굳이 또 생각하지 않았을 지점이라 그런 것 같아요.






남들 말하는 육아법보다는 내가 살아온대로, 나름 단단하다 싶은 내 가치관에 맞춰 키우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 흘러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내가 이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지켜야 아이를 어떻게 지켜야하는지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서가은  저는 네 살짜리 남자 아이 기르고 있고요. 이름은 온유예요. 정원 님이 이 자리에 함께 있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데요.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고 생각했던 부분도 신기해요. 저는 어떻게 육아해야지 하는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래도 전혀 없었던 거에 비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저도 아이를 키우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그걸 돌봄이라고 딱히 생각하진 않았어요. 다른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저에겐 즐거움이어서 아이를 낳으니 자연스럽게 그 대상이 온유가 되었던 것 같아요. 임신 중후반기 쯤에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낳고 처음 2년 동안은 아이와 함께 하는 삶에 대해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어요. 육아에 올인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처음 몇 년간은 일을 못할 것 같더라고요. 일도 하고 아이도 키울 수 있을만큼 에너지가 많은 사람은 아니라서요. 에너지를 쪼개서 아이를 돌보면 죄책감이 클 것 같았고, 일보단 아이라 먼저라는 생각이었는데요. 일과 가정 모두 내 삶이고, 내 삶을 아이한테 바치고 있다는 생각도 전혀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냥 삶의 방향이 바뀌는 정도라고만 생각했는데. 올해 들어서 고민이 많아요. 작년 말부터 고민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이 마음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에요. 아이가 주관이 생기면서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인지, 아이의 삶이 내 삶은 아니란 것을 느끼면서인지 혹은 이제는 다시 나가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일과 가정을 모두 챙기는 것은 내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인지 모르겠는데요. 처음 시작이 자연스러웠던 것에 비해 요즘은 방향을 잃은 느낌이 들고, 내 스스로 방향을 잃으니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 전에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키운 것은 아니었지만 남들 말하는 육아법보다는 내가 살아온대로, 나름 단단하다 싶은 내 가치관에 맞춰 키우면 아이도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 흘러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이 생각에 의심이 들기 시작하니까 애를 키우는 데도 자신감이 떨어지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 싶기도 해요.
송다혜  저는 처음에 가은 님의 글을 인스타그램에서 봤을 때 가은 님이 온유를 낳고 변한 것 같다고 느꼈어요. 온유에 대한 글을 올리기 전에는 그렇게 글을 많이 업로드하는 타입이 아니었던 것 같거든요. 가끔 사진은 올려도 글은 장문으로 쓰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온유에 대한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도 길어지고, 사적이고 개인적인 감정들도 세세하게 쓰고, 업로드 주기도 짧아지고. 저는 지켜보는 제 3자로서 이 현상이 재밌더라고요. 아이를 낳고 달라졌잖아요.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고요.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육아 일기처럼 느껴지진 않았어요. 육아를 통해 본인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느낌이었달까.
서가은  온유 낳기 전에는 일로서 내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삶이 내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가는 거라면 지금은 육아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거잖아요. 근데 이 대단한 프로젝트에 남는 게 없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글로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이가 초기에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니까 성장 과정이라든지 아니면 그 순간 내가 느낀 세밀한 감각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저장해두고 싶었어요.
송다혜  정원 님이랑 가은 님이 원래 같은 일을 했었잖아요. 저 역시 그 프로젝트를 함께 했었고요. 일종의 메이커 스페이스처럼 아이들이 자유 의지로 자기 작업을 할 수 있는 어린이 공간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이었는데요. 그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의 아이를 돌보다가 내 아이에게로 시선이 옮겨지며 생긴 변화들이 흥미로웠어요. 아이를 돌보는 것이 일이었다가 생활이 되면서, 비록 ‘아이’라는 같은 주제여도 남의 아이에서 내 아이로 대상이 달라지니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가은 님이 고군분투하는 걸 보는 것이 처음이었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쓰는 모습이 저에게 더 와닿았어요. 그런 의미로 육아 일기처럼 안 보이고 한 사람의 삶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졌달까요. 그 감상이 지금 이 프로젝트까지 연결된 것 같아요. 
서가은  주제에 맞춰서 제 이야기를 마무리를 해보자면, 작년부터 올해까지 사춘기가 온 것처럼 ‘내가 뭘 좋아하는 사람이지? 뭘 잘하는 사람이지? 나 뭐 하면서 살아야 되지? 밥만 하고 빨래만 하다가 내 삶이 끝나겠다' 이 생각이 드니까 진짜 너무 절망적인 거예요. 아기 어린이집 보내고 맨날 그것만 하고 있으니까. 요즘에는 집으로 바로 안 들어가고 어디 들어가서 책 읽으려고 해요. 뭔가를 돌보려면 나를 돌보는 게 우선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내가 나를 잘 알아야만 내 방식대로 돌봄을 할 수가 있는 것 같고요. 사실 모범 답안은 진짜 많잖아요. 따라할 방법은 정말 많지만, 그게 나는 아니니까. 내가 이 아이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지켜야 아이를 어떻게 지켜야하는지 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인지 돌봄의 의미가 저한테 많이 와 닿는데요. 집안일에 대한 욕심을 좀 내려놓고 책도 많이 읽고, 독서 모임도 하니까 회복이 되더라고요. 다혜 님이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큰 도움이 되고요. 
송다혜  이런 포인트가 재밌는 것 같아요. 정원 님이랑 가은 님은 다른 대상을 잘 돌보기 위해서, 내가 먼저 준비가 돼야 하고 그래서 나를 돌봐야 하는 걸 느꼈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혜성 님을 통해서 씨앗을 심고 돌보기 시작했는데요. 그때 당시에 저도 마음이 많이 힘든 상태였는데, 식물 돌보는 것을 통해 저를 돌볼 힘을 얻었거든요. 이 차이가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를 돌보기 위해서 사물을 더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인 것 같아요. 우리가 <사물함>을 왜 만드는지 생각해보면 이 과정을 통해 삶을 사유하고 그것이 결국 나를 반영할 수 있어서인 것 같아요. 독자건 참여자건 <사물함>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시간을 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스스로를 돌보는 매개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강아름  저희는 체조 스튜디오이고요. <사물함>이라는 매거진을 만들고 있어서 이 자리에 참여했는데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무언가를 돌보기 위해서 나를 돌봐야 한다고 얘기를 하셨잖아요. 근데 저희 같은 경우는 오히려 저희를 돌보기 위해서 사물을 더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인 것 같아요. 저도 돌봄의 순서가 좀 바뀌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정은  전 반반인 것 같습니다. 저는 혼자 살았을 때는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어요. 결혼하고 한 6개월 지나고 나서 드는 생각이 ‘내가 아프면 안 되는 입장이 됐구나. 아프면 상대방이 너무 고생이니까, 나를 돌봐야지.’로 바뀌었어요. <세상에 이런 일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아저씨처럼 만들고 싶지가 않아요. 왠지 그럴 것 같아요. 남편은 좀 그런 캐릭터거든요. 결혼하고 건강을 더 신경 쓰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내가 상대를 챙기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대신 내가 아파서 상대방에게 피해주는 것을 하지 말아야겠다. 결혼하고 나서 ‘지금처럼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제일 먼저 들어서 스스로도 놀랐어요. 
최정원  제가 느끼기엔 정은 님은 자기 삶을 잘 가꾸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있었거든요.
이정은  저에게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 같아요. 내 바운더리 안에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한 가치인데, 그 바운더리 안에는 사실 남편도 못 들어오는 것 같아요. 물론 같이 가는 거지만, 각자의 주체성이 중요하달까요. 그래서 결혼하고 나서 내 이름이 사라지고, 며느리라는 역할이 생기는 것에 대해서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치열했던 것 같아요. 2주 동안 가만히 누워서 아무 것도 못하고. 
최정원  그렇게 힘들었구나.
이정은  별 건 아니었는데 뭔가 너무 싫은 거예요. 그러니까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거예요. 제가 남자 형제가 있어서 차별을 받고 자란 것도 아니었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라다가 결혼하고나서 사회 테두리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잖아요. 근데 태어나서 처음 경험해 보니까. 저는 제가 진짜 중요한 사람이라고 엄청 우겼어요. 침해당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저도 열심히인 것 같아요. 제가 기분이 나쁘면 기분 나쁘다고 얘기를 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열심히 사는 것 같아요. 그 부분에 있어서는, 타협 없음.
최정원  제가 그런 걸 잘 못하는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정은 님한테 호감을 느낀 부분이 그런 부분이었어요. 저는 싫다는 표현도 수동적으로 하거든요. 티내는 방법도 잘 모르겠고. 물론 어느 정도 저만의 방법이 있겠지만, 좀 무른 편이랄까요. 한계점이 오면 그냥 아예 안 봐버리는 식으로 해결하니까, 정은 님의 방식이 건강하다고 느껴졌어요.
이정은  왜 이렇게 잘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렸을 때부터 중요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이 싸워도 봤고요. 많이도 강하게 말을 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저만의 언어도 없고, 스스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오해 받으면 오해 받는 대로 했다면 그래도 지금은 배려할 줄 아는 말하기 방법을 써요.
서가은  인상 깊었던 게, 정은 님 남편이 ‘뭐 먹을 거야?’ 물어봤다가 메뉴 정하는 것부터 장 봐서 식사 준비하는 과정을 다 시키는 걸 본 적 있는데. 정은 님이 말하는 것이 그런 방법인 것 같아요. 나를 지키고, 상대방도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방법이요. 저도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요. 남편이 요리를 전혀 안 하거든요. 진짜 안 되겠다 싶어서 처음부터 다 시키고, ‘오늘 정말 신경 안 쓸 거야.’ 말하고는 저는 눈 감고 있었거든요. 근데 애호박을 꺼내서 '어떻게 잘라야 돼?’ 물어보는 거예요. ‘이쪽 잘라.’ 그러면 ‘그다음엔 어떻게 잘라야 돼?’ 또 물어보는 거예요. 그때는 일일이 다 알려주긴 했던 것 같은데. 결국 그 사람은 그걸 못 배웠죠. 스스로 깨닫거나, 유튜브를 찾아보거나, 자기가 배우려고 노력했어야 하는데.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냥 지시에 따랐을 뿐인 거지. 그 후로도 영영…
문혜성  애호박을 못 자르게 됐습니다.
이정은  메뉴를 혼자 고민하는 게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까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어느 부분에서 자꾸 화가 나는데, ‘일단은 그냥 시켜 먹거나, 뭘 하자’라고 하다가 생각해 보니까 남편이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전혀 모르니 대화가 안 되는 거였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했을 때 살림이라는 건 세탁기를 돌리는 게 아니고. 세탁기 청소 주기를 체크하는 게 살림이야. 세탁기 돌린다고 생색내지 말아. 저거 언제 살균하는지 알아? 냉장고도 똑같다.’ 하고는 세탁기랑 냉장고를 넘겨줘버렸어요. 저는 어차피 하던 사람이니까 대충만 봐도 알잖아요. 그러고는 거의 몇 개월 동안 장을 안 봤는데, 지금도 저 장은 잘 안 보거든요. 근데 이게 진짜 평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 혼자 고민할 것도 아니고. 우유가 없어서 나 혼자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게 되는데, 그게 너무 짜증 나는 거예요. 같이 먹는데, 심지어 나보다 더 많이 먹는데.
문혜성  궁금한 게, 아직 자녀가 없으시죠? 제가 정원 님 생각하면서 동생을 기르던 방법이 아이를 기르는 데도 적용이 되었을까 궁금했거든요. 근데 정은 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방식이 육아에도 반영이 될까 궁금해져요.
송다혜  그럴 것 같아. 가치관인 것 같아요.
이정은  냉장고에 재료 있는 거를 음식했다고 말할 수 없죠. 얼핏 그런 말을 정희진 작가 책에서 본 것 같아요. 내 안에 ‘그거다’ 하는 거 시켜봤는데, 정답이었어. 그때부터 계속 편한 거예요. 왜냐면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니까. 냉장고를 봐도 너무 당당하게, ‘계란 5개 밖에 없는데’ 이렇게 하기도 하고. 그간 이 에피소드는 까먹고 있었는데 결혼한다는 친구들한테 제일 먼저 해주는 말인 것 같아요.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요.
서가은  아직도 못하고 있어. 이걸 들었는데도 못하고 있어.
이정은  매니지먼트는 이런 거야.
서가은  저는 애 재우고 나서야 장보고, 필요한 애기 물건 사는데. 아마 핸드폰 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장보는 게 뭐 대수야’ 라고 생각을 할 거야. 내가 그 생각을 아예 뜯어 고치려면 이렇게 해야 되는데… 아무리 말로 설명해 봐야…기회를 놓쳤다는.
송다혜  같이 고양이를 기르는 것처럼 남편이랑도 같이 집을 돌보는 거라 생각하면, 사실 살림에 대한 가치관이 서로 달라서 다툼이 일어나는 거잖아요. 저는 처음에 그걸 많이 느꼈거든요. 왜 자꾸 싸우지 생각해 봤는데, 청결도에 대한 서로의 기준이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정도 더러울 때 나는 벌써 치우고도 남았어야 되는데 누군가한테는 조금 더 있다가 치워도 되는 거죠. 저는 그 상황이 답답하니까 도대체 왜 안 치우는지로 말싸움이 시작됐던 거예요. 기준이 달라서 그렇다고 느꼈거든요. 그걸 어떻게 맞춰가야 되는지가 숙제더라고요. 사실 맞춘다는 게 가능한 건가? 누군가가 조금 기준을 낮추고, 누군가는 높여야 하는 건지, 아니면 누군가 한쪽이 그냥 져줘야 되는 건지. 하나의 살림이나 대상을 같이 돌본다고 할 때 가치관이 다르면 어떻게 기준을 맞출 수 있을까요?
이정은  ‘이렇게 하면 나는 굉장히 불쾌해.’라고 얘기하는 편이에요. 그러니까 ‘잘 치우고 안 치우고 네 성격이고 모르겠고, 나는 이걸 보면 좀 불쾌해.’ 이렇게 하고 끝나는 편이긴 해요.
송다혜  그 다음은요? ‘그러니까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 가 아니라 그냥 끝내나요. 내 상태에 대해 말했으니까?
이정은  저도 처음에 그렇게 해봤는데 이상한 데로 불똥이 튀더라고요. 그냥 퇴근해서 옷 벗어놓은 건데, 그거에 화 내게 되고. 근데 사실은 그게 문제가 아니어서, 그냥 제가 화나는 포인트를 잘 설명을 하려고 노력한 거 같아요.
송다혜  난 불쾌하니까 이걸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까지 가면 잔소리가 될 수 있잖아요. 그렇게만 하면 잔소리로 느껴지지는 않을 수 있겠다.
권혜민  아이 교육할 때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유학 생활할 때 아이가 있는 집에서 머물렀는데요. 아이가 5살이고, 엄마는 저보다 10살 많은 한국 사람, 아빠는 스페인 사람이었어요. 그 집에서 엄청 많은 걸 배웠는데. 그중에 하나는 아이 엄마가 항상 아이한테 차분하게 모든 걸 다 설명을 하더라고요. 집에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엄청 편하게 지냈거든요. 한 번도 싸움이 일어난 걸 본 적도 없고, 애가 막 울면서 떼쓰는 것도 본 적이 없고. 그냥 슬퍼서 우는 정도. 한 번은 혼낼 때 보니까 다른 건 다 설명을 잘하는데 어떤 일에 대해서는 ‘안 돼. 엄마는 이거 싫어서 안 했으면 좋겠어.’라고만 말하더라고요. 아이가 왜 그러냐고 계속 물어보는데 ‘설명할 필요 없어. 이건 그냥 안 되는 거야.’ 하고 딱 끝내는 거예요. 싫은 거를 명확하게 얘기 해주니까, ‘너도 그거 싫지? 엄마가 그거 할 때 싫지? 나 그거 안 하잖아.’라고 설명을 하는 거 보고는 저것도 되게 중요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정은  얼마나 깨끗하게 닦는지는 그냥 부수적인 것 같고. 이 상태를 내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걸 알면 조금씩 차차 나아지지 않을까?
서가은  근데 내가 어떤 부분이 싫은지를 정확하게 알아차리는 것도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냥 짜증이 나잖아요. 이유는 모른 채, 그냥. 진짜 작은 거 하나인데, 지나치게 터질 때도 있고.
이정은  좀 미성숙한 방법이긴 한데 저는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는 스타일이에요. '나도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짜증나.’ 이렇게 말해요. 나중에 샤워하다가 ‘내가 미쳤다.’ 반성하고 나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죠. 
문혜성  정은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싫어하는 거를 안 하는 거 말이에요. 제가 다혜랑 동업 시작하고 예전 상사에게 동업할 때 가장 필요한 게 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쭤보니까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잘해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먼저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마라.’ 근데 그분이 부부 관련된 콘텐츠로도 활동을 많이 하시고, 동업으로 사업도 하고 계시니까 더 그럴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본인도 처음에는 잘해주려고 하고, 잘 하려고 했는데 그것보다는 먼저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싶으시더래요. 근데 사실 또 문제는 가은 님 말이 맞죠. 싫어하는 것이 뭔지를 알아야 하는 거.
이정은  그래서 나를 잘 돌보고, 나를 알기 위해서 식물도 키우고 하는 거겠죠.
서가은  남편이든 아이든 타인과 관계할 때 그런 점이 명확해지는 것 같아요. 관계 속에서 자꾸 생각할 기회가 생겨서. 
이정은  문제가 생겨도 쉽게 피할 수 없으니까요. 친구면 ‘빨리 집에 가’ 이러고 끝내면 되는데, 이건 집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강아름  돌봄이란 주제에 대해 들었을 때 저는 살면서 뭔가를 딱히 돌보진 않았던 것 같아 상대적으로 제일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물함>으로 사물에 대한 얘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일단 참여하긴 했지만, 사물은 돌본다는 개념은 아닌 것 같아요. <사물함> 매거진을 만드는 방식을 생각 해보면, ‘관찰하고 또 더 들여다본다’ 거든요. 그런 행위를 통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우리 주변도 돌아보게 되고. 우리가 <사물함>을 왜 만드는지 생각해보면 이 과정을 통해 삶을 사유하고 그것이 결국 나를 반영할 수 있어서인 것 같아요. 독자건 참여자건 <사물함>을 보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시간을 주는 것이기도 하고요. 스스로를 돌보는 매개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문혜성  저희도 이번에 체조 스튜디오와 만남을 준비하면서 인터뷰도 찾아보고, <사물함>의 질문들이라는 코너도 읽어봤는데요. 굉장히 인상 깊었거든요. 어떤 접점이 있을까 고민하고 계셨던 것과 달리 저희는 모임 주제와 <사물함>의 결이 잘 맞고 또 주제 의식도 같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돌봄의 행위는 관찰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가은 님하고도 <레터 투 레터>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건 결국 다 관찰에서 시작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 나누기도 했고요.
최정원  저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사물함> 자체가 두 분의 자식 같은 존재 아닐까? 저랑 가은 님도 함께 어린이 작업실 프로젝트를 하면서, 작업실이 우리 아이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거든요.
서가은  그런데 사물을 관찰하는 게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를 들여다 보게 하는 매개체라고 했는데, 사물을 깊이 관찰하는 것이 두 분한테 어떤 의미인지도 궁금해요.
이정은  <사물함>을 발행하는 것은 일이라기 보다는 재미예요.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외주 일을 하는 힘. 그래서 사실 <사물함>에 대한 것은 최대한 스트레스도 안 받으려고 노력하고요.
강아름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 처음의 마음인 것 같아요. 이 일을 왜 했을까?
이정은  기본적으로 예쁜 오브제를 좋아하는 것 같긴 해요. 사업적으로 접근할까 고민하는 시기가 있긴 했는데, <사물함>은 건드리지 말자 결론내렸어요. 저희한테 <사물함>은 그냥 재밌게, 남 눈치 안 보고, 클라이언트 없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온전하게 할 수 있는 매개체인 것 같아요. 그래서 광고도 싫고, 판이 더 커져서 우리한테 부담이 되는 것도 싫고 그래요. 그냥 매번 설레는 것 같아요. 평소엔 잊고 있거든요. 계속 외주 일을 하다가 슬슬 만들어야 하는 타이밍이 되면 자연스럽게 ‘뭐할까?’하면서 우리 상황을 환기하는데요. 누가 <사물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두서도 없이 어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거예요.
송다혜  ‘질문들’ 코너에 있는 내용들이 문학적이고, 깊이가 있으면서 구체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는데요. 특정 오브제나 브랜드를 성찰하는 매체는 많지만,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독특하다고 느꼈어요. 이런 태도가 두 분의 마인드인가 싶기도 했고. 어떻게 그런 질문들까지 도달할까? 1차원적인 질문들이 나올 수도 있잖아요.
강아름  그 질문들이 저희에게도 제일 중요해요. 처음부터 질문을 다 만들어놓고 책을 만드는 것은 아니고, 중간에 생각날 때마다 이 질문들을 다 읽으면 책의 흐름까지 확인할 수 있도록 계속 수정해요.
문혜성  목차 같은 느낌이네요.
이정은  어느 정도 잡고 있는 기준선이 있어서 그 안에서 편집도 하고, 다듬어요.
서가은  <사물함>을 만들 때 사물의 역사도 공부하고,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면서 질문의 깊이도 생기잖아요. 이 과정에서 오는 통찰이나 개인적인 감상이 있어요? 그 과정을 거쳤을 때의 깨달음이 있을 것 같아서요.
송다혜  저도 비슷한 게 궁금했어요. 각 호마다 사물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니까 매번 마무리 지었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정은  마무리 지으면 항상 불안하죠. 어쨌든 이걸 내보내야 되니까, 그때만 딱 자식 같은 거 같아요. 우리의 아웃풋이니까. 인쇄물에 오타는 없을지 엄청 불안하고. 사물 하나를 통찰해서 나한테 어떤 것이 남았다기 보단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읽을지가 제일 궁금하고요. 우리의 질문 중에 딱 하나만 어떤 사람 마음에 남으면 좋겠다는 마음 정도만 있어요. 그러면 <사물함>역할은 끝난 거 아닌가 싶어요.
강아름  <사물함>에 사람들이 그림 그려주는 코너가 있는데요. ‘이걸 내가 만들었다. 끝냈다.’ 이 때보다도 오히려 그 그림들을 보면서 얻는 즐거움이 더 큰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맞아, 이런 게 있었구나.’ 하는 감각들이 오히려 책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에요.
문혜성  만드는 이와 보는 이의 감정이 순환 되는 것 같은데요. 저희도 돌봄은 일방적인 원웨이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돌봄의 과정 중에 얻는게 되려 많은 것 같거든요.
송다혜  혹시 그런 것도 있을까요? 주제를 정할 때는 어느정도 애정이 있어서 선정하지 않을까 싶은데, 가령 <사물함> 주제가 컵이라면, 이걸 매거진 이슈로 다뤄야지 마음먹고 시작했을 때랑 한 호를 끝내고 났을 때의 마음이 달라지는지 궁금해요.
이정은  그림을 특히 많이 그려야 하면 진짜 꼴도 보기 싫은 것 같아요. ‘내 앞에서 컵 이야기도 하지마.’ 하고. 처음에 컵의 어떤 부분이 흥미로운지 얘기를 나눌 때가 제일 재밌어요. 주제를 컵으로 정하고 ‘그래서 우리 무슨 얘기 할 건데?’ 이렇게 떠들 때가 진짜 에너지 만빵.
강아름  그 컵에 대해서 비로소 인지했다.
이정은  이 과정이 저희에게 에너지를 주는 것 같아요.
강아름  처음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떤 이야기 중에 갑자기 젓가락을 보고는 ‘우리 살면서 젓가락을 쳐다보기나 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사람마다 사용하는 젓가락이 다르고, 그걸 선택한 이유도 다를 거잖아요. 그런데 살면서 우리가 그런 것들을 보려고 할까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던 것 같아요.
이정은  싫은 마음도 있었어요. 북유럽 스타일이다 뭐다 이런 게 너무 싫은 거예요. 물론 트렌디한 거 좋죠. 근데 뭐가 내 취향이고, 뭘 정말 좋아하는지 사람들이 생각하고 구매할까? 일관된 취향을 권유하는 광고나 라이프스타일 잡지 너무 싫다. 그런 거 말고 다른 거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물건 광고 말고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책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서요.
최정원  아까 다혜 님이 <사물함>이 문학적이라고 느껴졌다는 지점이 각 코너의 취지나 그걸 개인사와 연결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송다혜  계속 사물을 관찰하고 들여다본다는 건 뭘까? 특정 사물에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건 뭘까? 이런 생각을 해봤거든요. 강아지와도 서로 교감하면서 감정이 쌓이는 거잖아요. 그렇게 관계가 형성된다고 느끼는데. 사물과는 소통 하지 않지만, 사물을 중심으로 일하는 기업들이 쌓일 수도 있을 것 같고, 개인의 기호나 기억들이 쌓여 감정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고요. 두 분이 주제를 선정할 때 그런 것들이 기준이 되나요?
강아름  우리에게 어떤 관계여서 그 주제를 선택했냐는 걸까요?
송다혜  관계가 있어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강아름  컵이 정말 좋아서 선택했다기보다 더 중요하게 지키는 철칙이 있는데요. 그 물건을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 더 중요해요.
이정은  전혀 특별하지 않아요.
강아름  사물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그 사물을 매개체로 내 주변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이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이정은  회의할 때 물론 컵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더 많이 해요. ‘친구들 많이 왔다가 가서 남은 컵들 보면 좀 이상하지 않아?’ 이런 이야기나 ‘설거지할 때 컵 뒷면 보면 되게 예쁘지 않아?’ 이런 이야기들이요. 컵의 물리적 원형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긴 하는데 ‘근데 컵을 컵으로만 쓰는 거 좀 이상하지 않아? 여기에 라면도 먹을 수 있잖아? 그치?’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면서 그냥 만들어 간달까요.
송다혜  그러려면 정말 보편적인 사물이어야겠네요.






문혜성  저희가 오늘 초대를 했으니까, 사실은 모임의 시나리오를 정리했거든요.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엄청 긍정적이란 생각이 들어요. 오늘 다 같이 모여서 파일럿을 한번 해보자 했을 때 과연 이 모임이 어떤 의미가 있고, 방향성은 생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었는데요. 그저 수다라고 생각하기엔 대화 통해 제가 느끼는 바가 많고, 흥미로운 부분도 많고요. 시간 가는 것 못 느낄 정도로 정말 재밌네요. 
송다혜 저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이상인 것 같아요.
문혜성  <가장자리>라는 모임의 이름을 닮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요. 돌봄이란 주제로 이야기 나누러 모였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이 느껴져요. 돌봄을 뭐라고 정의할지에 대해 저희는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오늘 모인 분들께도 각자 생각하는 돌봄에 대해서 물어봐야하는지에 대해 고민했었는데. 딱히 그러지 않아도 각자의 에피소드에서 다 느껴지네요.
서가은  일상을 돌보는 것에서 큰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을 <사물함> 읽으면서 느껴요.
송다혜  맞아요. 설거지할 때 컵 뒷면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삶에 애정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최정원  저는 요즘에 개인적으로 여러 사건들을 겪었는데요. 오늘 주제랑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자기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있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나랑 상황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선호했다면, 요즘에는 나랑 상황은 달라도 자기 세계가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즐거운 것 같아요. 아까 가은 님이 말한 것처럼 아이를 키운다는 공통점보다는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비슷한 사람들이랑 만났을 때 받는 영감이나 에너지가 더 큰 것 같은데 오늘이 그런 자리인 것 같아요.
문혜성  저는 처피가 혜민 님 집에 있을 때 한번 만났는데 너무 귀여웠어요. 그때 누군가 화장실 들어갔다 나오면 때리려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권혜민  무조건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을 때려야 돼.
문혜성  오늘 혜민 님 이야기를 듣고나니 처피한테 입체적인 캐릭터가 부여돼서 더 애정이 생기는 것 같아요.
권혜민  원래는 인스타 계정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사라졌어요.
서가은  때린다는 게 이렇게 귀여운 일이야.
최정원  혜민 님도 나올 때마다 늘 때리나요?
권혜민  아니, 저는 안 그래요.






식물을 다루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되면서 자연과 가까이 지내는 이점을 전달하는 활동에 대해 고민이 생겼어요. 식물을 돌보는 거 말고 또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요. 그래서 자연에 조금 더 다가가려면 나를 버리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먹고 싶은 거 다 먹지 않고, 사고 싶은 거 다 사지 않는다든지 결단이 필요한 순간들이 많아진달까요.


송다혜  제가 준비한 마지막 질문을 해볼게요. 돌봄이라는 행위를 통해 새롭게 발견한 나의 모습이 있나요?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을 거고 혹은 싫은 부분도 있을 수 있고요. 이 질문을 통해 여쭤보고 싶었던 것은 사실 새롭게 발견한 모습을 통한 변화거든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를 바꾸는 계기가 된 부분이 있는지요.
문혜성  저는 어려서부터 집에 항상 개, 고양이가 있었어요. 많을 때는 그 집에 사는 사람 수보다 더 많은 개, 고양이가 있었는데. 돌보는 행위 자체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닭도 키우고, 거북이도 키우고 관심이 생기는 건 한번씩 다 키워본 것 같은데요. 돌보는 것이 관계 맺는 행위라고 정의 내려본다면 거의 관계 중독자에 가깝달까요. 서른 살까지는 동물처럼 인터랙션이 활발한 것들에 주로 흥미를 느끼다가 자연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요. 마음이 특히 힘들고,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을 때였는데, 문득 자연은 즐기기에 돈도 안 들고, 모두에게 공평하더라고요. 유행을 타지도 않고, 오히려 너무나 세련되어 놀라운 것들이 많고요. 알면 알 수록 깊어지는 세계에 흥미를 두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농업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그러면서 변한 태도가 있다면 요즘엔 저 자신을 많이 버려야 된다는 생각을 해요. 자연을 좋아하지만 과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뭘 노력하고 있나하는 생각을 하면 하는 것이 거의 없더라고요. 저는 돌본다는 행위를 도구로서 활용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돌보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단 저의 즐거움을 위해 하는 건데요. 식물을 다루는 것을 업으로 삼게 되면서 자연과 가까이 지내는 이점을 전달하는 활동에 대해 고민이 생겼어요. 식물을 돌보는 거 말고 또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요. 그래서 자연에 조금 더 다가가려면 나를 버리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먹고 싶은 거 다 먹지 않고, 사고 싶은 거 다 사지 않는다든지 결단이 필요한 순간들이 많아진달까요. 
송다혜  씨드키퍼를 운영하기 전에도 혜성 님은 식물에 관심이 많았고, 또 식물을 기르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일이 되면서 마음가짐이 변한 거네요.
문혜성  취미였다가 일의 영역으로 옮겨오면서 괴리가 생기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즐기고 끝이라면, 이젠 마냥 즐길 수만은 없으니까요. 일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니 알아야 하는 것도 많고, 모르는 거면 또 괴롭고요. 느낌이 아예 다르죠. 얼마 전에도 다혜랑 이야기한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탄하게 되는 모습들이 있는데요. 식물의 변화에 둔감하다가도 어느날은 또 눈을 감았다 뜬 사람처럼 안 보이던 것이 확 보이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예를 들면 아카시아 나무를 밖에서 기르다가 이번에 스튜디오 오픈한다고 실내로 들여왔는데 예전 잎들을 다 떨구는 거예요. 그러면서 새잎을 내더라고요. 이 현상은 외부 환경에 익숙해진 나무가 살아 남으려고 지금 옮겨진 환경에 자기를 맞춰서 적응하는 과정이거든요. 보려고 딱히 노력하지 않다가도 이런 순간을 마주하면 마음에 크게 남아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될 때 내가 버려야 되는 내 예전 모습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요. 억지로 인간사에 빗대서 얘기하고 싶은 건 아닌데요. 식물이 ‘너 이렇게 살아.’라고 말해 주지 않았는데도 분명 배우게 되는 점들이 있어요.  
최정원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이건 개인적인 이야기이긴 한데요. 저희 집 남편이 제가 처음 사귄 남자친구거든요. 사람을 그렇게 좋아해본 게 처음이었어요. 사귄지 한 100일쯤 되었을 때 남편한테 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좋은 상황일 때 그 순간을 놓고 싶지 않을 수 있잖아요. 그 순간을 영원히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우리 사이엔 너무 많은 변화들이 있었죠. 관계도 변하고, 관계를 통해 저도 많이 변했고요. 지금은 변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이 작업실에서 일할 때 느낀 게 유년 시절이 정말 짧더라고요. 어린이들은 1년 사이에도 많이 변해요. 아윤이를 키울 때도 어떤 마음이 공존하냐면 순간 순간을 만끽해야겠다는 생각, 한편으로 어려운 일들은 길게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저를 지탱해줘요. 변화하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그게 좋든 나쁘든 지나고 나면 나를 성장시키고 변화할 수 있었던 긍정적인 일 같아요.
서가은  저는 책임감을 나누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데요. 둘이 만나 낳은 아이에 대한 생각도 각자 다를 수 있으니까요. 다르지만 결국 상대방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어야 책임감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이정은  아름이랑 제가 디자인 작업할 때 저는 작업하던 거를 중간에 그대로 넘기거든요. 근데 이걸 디자인 스튜디오 운영하는 다른 친구들은 이해를 못해요. 어떤 거냐면 예를 들어 제가 ‘가-나-다-라’까지 해야하는데, ‘가’ 쓰고 그 뒤에 ‘나’가 잘 안 풀리면 ‘이거 네가 마무리해’ 하면서 그냥 한 파일을 아름이에게 넘기거든요. 다들 신기해하길래 이게 왜 가능한가 생각해봤는데요. 부끄럽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동료라고 해도 내 작업이 마무리 되지 않았다면 아직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저희는 하나의 작업물이 체조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나가고, 그건 동일한 책임감의 무게가 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실수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어쨌든 체조의 몫인 거고요. 내 작업이 미완성에 모나보여도 신뢰하는 대상에게 이걸 보여줄 수 있는가 또 없는가의 문제 같아요.
송다혜  공동으로 뭔가를 한다는 건 꼭 해야 하는 일에 대해서 서로 미루는 게 절대 없어야지 가능한 거 같아요. 내가 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하겠지 하는 생각을 버리고 그냥 내가 해야하지 않을까. 신뢰 관계 속에서 서로 이런 마음이면 좋은데, 나만 힘쓰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신뢰가 쉽게 깨질 것 같아요. 
서가은  대학원 때 룸메이트가 있었는데,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내가 조금 더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집안일을 하니까 불만이 안 생기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기분 좋지 않았어요. 어린이 작업실에서 일할 때 진짜 손발이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게 누가 더 한다 이런 마음이 전혀 없었고, 각자 자기 할 몫을 다 하고 있는데 이게 딱 맞아서 완성된다는 느낌을 자주 느꼈어요. 내가 잘 못하는 부분, 부족한 부분을 누군가 채워주고, 서로의 실력은 비슷하고, 누가 많고 적고 느낌없이 균형이 잘 맞는 느낌이요. 
최정원  근데 나를 그렇게 만드는 사람들이 또 있다. 나를 자꾸 재게 만드는 관계들이 많은 것 같아.
권혜민  서로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여자 4명이서 한 집에 살 때 모든 사람들이 다 머리카락을 치우고 있는데 각자 내가 제일 많이 치웠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기했어요. 또 그런 일도 있었어요. 그렇게 살 때 고슴도치를 키우고 있었거든요. 같이 사는 사람들이 집에서 나가는 시간대가 다 달라서 같이 모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정도 였어요. 어느날 보니까 고슴도치가 원래 손바닥보다도 작았는데, 한 달 사이에 너무나 커진 거예요. 손이랑 발이 땅에 안 닿을 정도로 살이 쪘더라고요. 각자 집에서 나갈 때 밥을 줬던 거 있죠. ‘왜 나만 밥을 주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다들 밥을 주고 있단 사실을 한 달 뒤에나 알았어요. 자기가 하는 일은 크게 느껴지는 구나 싶더라고요. 고슴도치가 살이 찌고 있다는 사실은 모른채로 말이에요.
최정원  뭔가를 함께 돌보는 이야기가 정말 재밌네요. 체조 스튜디오나 씨드키퍼의 이야기도 그렇고. 가은 님과 저는 작업실을 같이 돌보기도 했고.
서가은  그런데 혜민 님은 다른 사람과 함께 산 경험이 많으신 것 같아요. 친구들이랑 동물들이랑요. 정말 쉽지 않은 일 같은데.
권혜민  반대로 저는 혼자 돌보는 거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문혜성  저는 늘 혼자만 하다가, 같이 돌보는 걸 이제서야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결혼을 했고, 사업도 다혜랑 하니까요. 다른 사람과 뭐든 함께 해야하는 것이 저한테 익숙한 감각은 아닌데요. 뭔가를 같이 키워나가고 이렇게 같은 목표를 가지고 노력한다는 일이 새로워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발견하고 있어요. 






<가장자리> 라운드테이블 001

진행 일시: 2022년 8월 3일
진행 시간: 115분 29초 
참여자: 강아름, 권혜민, 서가은, 이정은, 최정원
기획/ 진행/ 녹취록 작성 및 편집: 씨드키퍼



<가장자리> 라운드테이블은 다양한 '돌보는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이야기장입니다.
라운드테이블은 계속해서 비정기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며, 전시 또는 책 등 다양한 형태의 모습으로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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